문화 / Culture

[이제재의 네덜란드 일기] 비워지면서 채워지는


첫 시집 『글라스드 아이즈』로 독자를 만났던 이제재 시인이 네덜란드에서의 일상을 에세이로 전합니다. 새로운 장소에서 시인은 자신을 3인칭으로 바라보며 ‘내’가 변화하는 순간들을 관찰합니다. 짧은 소설처럼 흘러가는 이 에세이는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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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7일

선생님, 하고 이제재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운하 근처 벤치에 앉아서, 그가 가진 가장 작은 메모장을 펼치고서였다. 특정한 선생님을 떠올리고서 쓰는 것은 아니었다. 살면서 때때로 그의 종이 위에는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기침처럼 터져 나올 때가 있었고 그러고 나면 그는 그 순간에 터져 나온 힘으로 그 자신이 쓰는 문장을 따라갈 수 있었다.

선생님, 여행을 가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는 말을 저는 종종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에 와서, 오늘 이 순간에 와서야 제가 저를 내내 부끄러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간 제가 너무나 유별나 보였습니다.

불안장애로 말을 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

성소수자로서의 시선에 대한 감각이 

시를 쓰며 살아가는 삶이 

제게 겹겹이 눌어붙어 이제재라는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삶이 불안하고 유별나고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제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저는 부끄럽고 외로웠습니다.

선생님, 저는 잘 살고 싶었습니다.

내가 이제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고

외로움이 당연해지는 곳에서

환경이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고 종종 들어왔듯이

달라진 환경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불안장애도

소수자로서의 정체성도

시인이라는 사실도

네덜란드에서는 어쩐지 가벼워질 것 같았습니다.

유별난 것이 유별나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저는 아직도 스스로가 부끄럽고

외로움을 때때로 느낍니다.

외로움은 곧잘 알 수 없는 슬픔과 함께 찾아오고

그럴 때, 무엇보다 잘 살지 못하는 것 같은 스스로를 바라보기가 힘이 듭니다.

선생님, 저는 저를 정말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다른 말로 어떻게 더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세요.

이제재가 그의 메모장을 덮었을 때 그날은 부활절을 맞이하는 첫 번째 휴일이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있었고 운하의 물결은 규칙적이었다. 그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며 숨을 길게 내뱉고는 벤치에서 일어나 그가 세워둔 자전거 쪽으로 다가갔다. 살면서 때때로 그는 선생님을 부르는 제자가 되어 편지를 썼고, 편지가 끝나면 곧장 선생님이 되어 제자에게 답장을 보낼 수 있었다.

바라는 그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의 편이다.

그 역할극이 끝나면 그는 이제재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닌 자리에서 행동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는 사람으로서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2022년 5월 10일

이제재는 자전거를 타고 틸뷔르흐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서쪽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헤이호프(Heyhof)까지 이어지는 자전거전용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그는 울창한 숲길을 양옆으로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오월이 되자 네덜란드의 해는 오전 6시에 떠 오후 9시에 졌고 덕분에 그는 정오의 시간대를 달리는 기분으로 저녁을 달렸다. 모처럼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그는 이날 하루 내내 일상의 순간순간을 느끼며 또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그는 어떤 힘의 도움인지, 일어나자는 생각과 함께 망설임 없이 일어났고 간단한 스트레칭 후 물 한 컵을 마셨다. 하나의 행동이 끝나는 마디마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쉼을 두었고 스스로를 조금 멀리서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바라보며 아침을 먹고 샤워를 했다. 청소를 하고 싶으면 청소기를 들었고 과정을 하나씩 거치며 비누칠을 하고 물을 틀어 닦아내는 설거지를 했다. 그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웠고 그 과정에서 무엇도 더해지지 않는 몰입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전거를 타며 그는 다시 숨을 들이쉬고 내뱉고 있었다. 그의 다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의 눈이 얼마나 넓은 풍경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지, 자전거에 닿는 그의 몸 부위는 어떻게 감각하고, 길은 바퀴를 통해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는 모든 것을 동시에 느끼며 그의 몸을 이완된 통로로 만들고 있었다. 길 가장자리에 몸을 붙인 그의 자전거를 다른 사람들은 곧잘 앞질러 갔고 그는 점차로 힘들이지 않고도 그의 자전거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워지면서 채워지는 생명력이 있는 거구나, 생각하며 그는 하늘과 키 큰 나무들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소나기가 내린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팔 윗부분과 허벅지, 어깨, 머리가 점차 젖어 들었지만 어쩐지 그의 마음은 평온했다. 비를 피하려 서두르지 않았고 언젠가 그가 썼던 시의 구절처럼 비를 맞아도 젖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일정한 속도로 페달을 밟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 위 사람들의 표정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내면에서 숲은 숲을 가로지르는 자전거들과 함께 확장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력을 함께 쓰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같이 달리고 있는 것일까. 그는 잠깐 서로에 대한 서로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했고 이 익명의 느슨한 무리 속에서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은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에게는 바라는 것이 없었고 이제재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그 자신에게서 먼 곳에 있었다.

한참을 가서 자전거 길 오른편으로 저지대가 펼쳐지자 그는 빼곡한 풀들과 듬성듬성 자란 나무 사이로 안개 같은 것이 옅게 펼쳐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새로운 풍경이었고 외국 신화나 판타지 소설에서나 접했던 신비한 생명체가 등장할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정령이 있다고 쉽게 믿을 수 있었겠다, 하고 생각하며 그는 가볍게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 가벼움을 간직했고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한 뒤에도 그의 몸은 비워져 있었다. 그는 당분간 비워진 채로 지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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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스드 아이즈
글라스드 아이즈
이제재 저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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