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SF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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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을 잘 읽는 비결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간단한 방법이지만 말처럼 간단한 독서법은 아니다.


책은 대신 읽어주는 장치가 없다. 물론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오디오북은 아직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매체가 아니고(많은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전자책의 경우 텍스트를 구매하고 불러내는 장치 역할은 할 수 있지만 “플레이” 자체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적극적으로 읽어내지 않으면 조금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독자라는 기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바로 그런 매체 환경에 관한 이야기다. 즉 독자라는 디바이스의 ‘읽기 설정’을 SF에 적합하게 조정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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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르, 어느 글이든 마찬가지지만 책 읽기의 기본은 있는 그대로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의 머릿속은 이미 특정 문학을 읽어내기 위해 미세 조정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순문학’이라고 불리는 작품군을 독해하는 데 적합한 ‘읽기 설정’처럼. 이것은 딱히 잘못된 일은 아니다. 주로 보게 될 작품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감상하는 방법을 고안해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한 편의 소설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단편소설도 마찬가지다. 그중 어느 부분을 기억하고 어느 부분을 흘려보낼지를 선별하지 않은 채, 인공지능처럼 소설의 모든 부분을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독서법이 아니고 가능한 방법도 아니다.


문제는 특정 문학장에서 발생한 독법을 모든 종류의 문학에 적용하는 순간 발생한다. 작가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내 주변에는 자기가 대중의 눈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있었다. 자기한테만 맞추면 대중도 재미있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섯 명은 서로 다른 눈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들의 주장이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대중’이라는 것이 단일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착각에 빠지기 마련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지만, 일상 공간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땅이 평평하다고 착각하고 살아간다. 마치 내가 서 있는 곳이 유일한 지평이고 이 평면이 세상 끝까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문학도 마찬가지다. 내가 서 있는 지평이 가장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사실 모든 종류의 문학장에서 발견되는 착각이다. 그 안에 있는 내가 평범하기에 내가 속한 무리가 치우쳐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할 뿐이다. 그중 ‘순문학’의 장이 유독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문학이 ‘특정한’ 문학의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모든 문학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와 자원의 배분에 직접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첫 번째 충고는 순문학에 특화된 읽기 설정을 잠깐 해제해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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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물 100퍼센트” 설정을 끄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대단히 당황스러운 설정이다. 뭐가 됐든 어느 한 요소의 비중을 100퍼센트로 설정하는 예술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수없이 일어난다. 문학상 심사평에서도, 잡지에 실린 짧은 비평 글에서도, 젊은 작가 지망생에게 기성 작가가 해주는 조언에서도, 심지어 내 책에 실린 해설에서도, “소설은 결국 인물이 100퍼센트인데 이 작품은 그 점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므로 부족하다”라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목격된다. 때로는 소설 초고를 검토한 편집자의 메모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보이곤 한다. 주인공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시나 사회 같은, 인간이 아닌 주체로 화제가 옮겨간 것뿐이다.


타워』의 첫 에피소드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에는 세 명의 박사가 빈스토크라는 권력의 추적을 피해 황급히 도시를 탈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세 사람의 뒤를 쫓는 것은 특정 인물이 아니다. 인구 50만 명이 만들어낸 빈스토크라는 사회의 권력장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수의 독자들이 이 대목을 읽고는 쫓아오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이 독법의 문제는 인물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이 아니라, 작품이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많은 요소를 그다지 주목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선언해버린다는 것이다. 소설은, 인물을 통해 형상화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아름다움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도 되는 예술 장르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예술이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우선 “인물 100퍼센트” 설정을 해제해보자. 인물의 비중은 30이어도 좋고 70이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이면 충분하다. 그 나머지는 새로운 미감이 채우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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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비결은 “자동 비유 찾기” 기능을 해제하는 것이다. SF는 현실을 반영한다. 사람이 쓰는 것이니 그러지 않을 방법도 없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이 현실을 비유하기 위한 기술적인 수단은 아니다.
이 조언의 취지는 과학소설 작품 속에 구축되어 있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기 위함이다. 어느 장면이 현실의 어느 부분을 반영한 것인지를 찾아보는 것은 재미있는 독해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숨은그림찾기가 일차적인 목표가 되면 놓치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 퍼즐 조각들이 구성하고 있는 작품 속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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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에는 2009년 당시 한국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 변화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다수 들어 있지만, 작가가 가장 먼저 바라는 것은 독자가 674층짜리 건물 하나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의 주민이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감각을 직관적으로 느껴보는 일이다. 그래야 작품에 몰입할 수 있고, 텍스트로 된 주인공의 삶에 충분히 공감하며 책을 읽어갈 수 있다.


현실의 은유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독자가 소설에 몰입하는 것은 최면에 걸리거나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정신 작용이어서, 꿈속에 놓여 있는 소품이 현실 세계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해내는 순간 그 꿈은 그만 자각몽이 되어버린다. 뒤쫓아오던 귀신에게 따라잡혀도 하나도 안 무서운 꿈이 되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SF를 어떻게 해독해야 할지 몰라서 이 방식을 택하곤 하는데, 나로서는 권하고 싶지 않은 방식이다. 그러니 “자동 비유 찾기” 기능도 일단 해제하자. 스위치의 위치는 제품마다 다를 수 있으니 각자 설명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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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은 결말을 찾는 법이다. 결말을 굳이 찾아야 하나 싶겠지만, 놀랍게도 그렇다. 문학장이 달라지면 결말을 놓치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폭발적이고 강렬한 결말을 떠올려보자. 모든 소설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수 하나에 가중치를 크게 주어서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놓으면 현상을 설명하기가 쉬워지니까. SF에서 폭발적인 결말은, ‘나’의 경계를 기준으로 바깥쪽을 향해 에너지를 분출하는 결말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갈등이 마지막에 이르러 세계의 변화를 끌어내는 방식이다. 반면 순문학에서 폭발적인 결말은 ‘나’의 경계를 기준으로 안쪽을 향해 에너지를 분출하는 결말이다. 인물 내면의 변화가 우선인 셈이다.


맹점은 이런 방향 차이에서 발생한다. 세계를 향해 폭발하는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는 묘하게도 내면을 향해 폭발하는 결말을 보고는 결말이 없다는 평을 남기곤 한다. 반대로 내면을 향해 폭발하는 이야기에 단련된 독자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이야기를 보고는 무언가 마무리가 덜됐다고 느낀다. 서로가 서로의 결말을 찾지 못한 것이다.


SF의 결말이 내면을 향하는 경우는 없을까? 대표적으로 윤이형 작가의 SF 작품들이 이런 방식의 결말을 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SF 독자들에게 결말이 없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분명 그 작품들에는 강렬한 결말이 있었다.


소위 “문단과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로서 나도 종종 비슷한 일을 겪곤 한다. 그래서 『고고심령학자』 는 결말이 셋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논리적 결말, 대중소설의 결말, 문학적인 결말이 한 권 안에서 쭉 이어지는데, 아마도 독자가 생각하기에 결말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은 한 군데 아니면 두 군데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소설이 둘 이상의 결말을 지니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므로, 차라리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결말도 결말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다. 아무튼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라면 적어도 결말이 없지는 않을 터. 인내심을 가지고 잘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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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가지는 정말로 관습적인 독법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다. SF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프로토콜 같은 것이 있다. SF 소설에는 이상한 기관 이름 같은 것들이 등장하곤 한다. 예를 들어, 내 소설 『청혼』 에는 지표면연합이니 궤도연합사령부니 감찰군이니 하는 조직이 나오는데, 이런 이름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다른 책에 나오는 외계예술위원회니, 패류해석학이니 하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꼭 필요한 개념이라면 작가가 본문 안에서 다시 설명을 할 것이고, 따로 설명이 없다면 굳이 의미를 이해하려고 고뇌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를 덧붙이는 이유는, 어느 날 같이 일하는 편집자들이 가끔 SF에 등장하는 가상 조직이나 가상의 기술 명칭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지나치게 긴 시간을 들이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측건대 작가가 원고에서 언급한 기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지 확인하는 역할 또한 편집자의 몫이어서 일어나는 일이겠지만, SF에서 이런 이름은 많은 경우 ‘A기관’, ‘B기술’로 처리하고 넘어가도 무방한 명칭들이다. 편집자가 아닌 일반 독자라면 더 그렇다. ‘작가가 이번에는 이걸로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하고 지나가면 그만인 개념들이니 너무 공들여 파고들지는 말기를 바란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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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중요한 설정 방법이 몇 가지 더 있겠지만, 핵심적인 요령은 다른 작품군을 해독하느라 만들어진 습관을 잠시 해제하는 것이니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적절히 즐기기를 바란다. SF라면 꼭 찾아봐야 할 포인트들을 따로 언급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위치를 아무리 많이 내려놓아도 인간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맹점들이 수도 없이 많을 텐데, 그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다. 맹점과 관점을 지니고 있기에 독자는 같은 책을 보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오독의 자유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저 어딘가에 있는 한계를 핑계로 고칠 수 있는 문제를 내버려 둘 필요는 없다. 자, 이제 가서 SF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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