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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 김만중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농업정보신문」과 「골든에이지」 등 신문사 잡지사에서 취재기자 생활을 하다 경제 인문 관련 출판사에서 기획을 하였고, 현재는 거송미디어 기획팀장으로 있음.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군주리더십> <조선을 뒤흔든 성 스캔들> <조선 군주의 정치기술> 등이 있다. 주로 조선의 역사에 많은 관심과 관련 글들을 쓰고 있다. 「한경리쿠르트」 「월간중앙 - 역사탐험」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목차
- 명종의 이상한 죽음
임금이 죽던 순간
당쟁을 즐긴 임금
한 시대는 가고 한 시대는 오고
선조, 이이와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대간들과 긴장관계에 빠지다
전하! 군신간의 의리를 지키소서
이이 죽다, 이이 통한의 슬픔을 느끼다
임진왜란 일어나다
선조 퇴진론 슬그머니 고개를 들다
선조 요동으로 도망하려 하다
임금 노릇 못해 먹겠다
대동강 이서는 중국 땅으로 한다
이몽학 반란과 의병들을 역모로 몰다
전쟁이 다시 터지다
전쟁은 끝나고 토사구팽 시키다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
선조 종친들 너무 감싸고 돌다
40년 즉위를 축하하라
비망기로 세자에게 전위를 지시하다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실록의 평가
- 선조 연간 사건들
- 참고문헌
책 속으로
◆ 선조의 열등감은 고집으로 표출되다 선조 집권 초 동서붕당이 일어나던 1575년(선조 8)까지 신진 개혁세력과 점진적인 개혁을 바라는 온건파간의 마찰이 심하였고 1570년(선조 3) 기대승은 이준경과 마찰을 빚다가 나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선조는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대한 완전한 복권을 원하는 사림 세력들의 의견을 묵살, 아직도 그들 사건 당사자들이 왕실과 조정에서 살아 있는 점을 감안하여 예민하고 정치적 부담이 있는 이 사건을 조용하게 처리하려 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젊은 선비들은 주로 대간직에 머물게 하고 의정부 육조 고위직은 나이가 든 노련한 인물들로 배치하였다. 선조는 중종과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 덕흥군의 세 번째 아들이다. 창빈 안씨는 궁녀 출신이란 말도 있어 선조는 궁녀의 손자인 셈이다. 그런 관계로 선조는 스스로 다른 군주에 비해 정통성이 약한 군주라는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1577년(선조 10) 5월 아침 강연에서 허봉이 “전하가 안빈을 ‘우리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몹시 잘못 된 일입니다. 이미 전하는 선왕의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도 사가에서 지내야 마땅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갑자기 큰 소리로 “허봉이 저 혼자 잘난 체 하고 있다. 옛사람이 어떤 글을 읽어도 한 구절의 뜻에 매달려 있지 말라 하였거늘 내가 할머니를 설사 우리 할머니라 하는데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 허봉은 말만 삐뚤어진 인물이 아닌 것 같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화를 내었다. ◆ 젊은 사림 세력 싫어해 선조는 사림의 폭넓은 지지를 얻기 위해 젊은 신진세력을 폭넓게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림세력의 집권 초반 득세는 선조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주로 삼사(?)에 포진하여 있으면서 임금의 인사에 심하게 간여하였다. 사림의 득세와 왕권의 추락을 보여주는 사례는 이미 명종 후반부터 엿보이기 시작했다. 명종 21년 1월, 개성부의 유생들이 송악산의 대왕사(?<?에 불을 질러 왕 대비가 내관을 시켜 중지시키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임금(명종)은 의금부로 하여금 유생들의 죄를 다스리려 했으나 성균관에서 들고 일어나 할 수 없이 그들을 모두 풀어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게 왕권의 약화와 사림들의 득세가 서서히 표면화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선조가 집권한 것이다. 선조 6년 6월, 우의정 노수신이 임금에게 호조판서 임명에 대해 정2품에는 호조판서를 추천할 사람이 없으므로 늙지 않은 사람 중에 뽑아 주기를 건의하였다. 노수신은 을사사화로 인해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어 순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19년 만에 복직된 인물이었다. 그는 이언적과 친분이 두터운 사림의 원로였다. 임금은 노수신의 의견에 “젊은 사림 가운데 호조판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라며 “내 생각에는 조정이 너무 젊은 인물로 채워지면 공론을 전제로 매일 시끄러운 일만 반복되니 내가 번거로울 따름이다.”라는 말로 젊은 인물들의 관료 진출을 걱정했다. 선조는 경연자리에서 학문적 논쟁은 즐겨 했지만 그 논쟁이 정치 논쟁으로 흐르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 특히 젊은 사림들은 성리학적 이상을 현실 정치로 접목 시키려 하다보면 과거 정치 사건을 논쟁에 끌어 들였고, 이에 임금은 피곤해 하였다.
출판사 서평
- 명종의 이상한 죽음, 그의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소문과 선조 등극 과정 - 선조 초기 이황과 기대승, 그리고 이준경 등 보수 진보의 갈등 - 율곡 이이를 전면에 내세워 개혁정치를 시도하다 - 기축옥사와 선조의 거듭되는 정계개편 -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선위파동 - 임진왜란 이후 왕권 강화를 위한 선조의 정치 기술 - 광해군 등극 과정의 정치적 갈등 야사에는 명종이 복상사를 당해 죽었다고 한다. 서른 셋 젊은 나이에 명종은 거의 20년 동안 어머니 문정왕후의 치마 폭에 갇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후계자도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숨을 거둔다. 명종이 죽던 날 이상한 점은 몇가지 발견된다. 죽기 하루 전에 시약청이 개설된 점, 임금의 임종을 막 앞둔 상황에서 고위 관료들이 경회루에서 무언가 은밀한 밀담들을 나누는 장면, 마치도 이미 명종비 인순왕후와 이준경의 후계자를 둘러싼 흥정 등 실록을 꼼꼼히 읽다보면 다소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 무능한 군주가 결국 정치적 혼란을 부추겼다 조선 제 14대 군주 선조는 장장 40년 7개월 동안 조선을 통치하였다. 조선의 임금 가운데 영조, 그리고 고종 다음으로 오랫동안 통치를 한 임금이다. 조선이 왕조의 유래없는 500년 넘는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로 후계자의 철저한 교육(세자교육)을 드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불행하게도 선조는 이런 세자교육, 후계자 특별 수업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는지 선조는 열 일곱 어린 나이에 7개월 수렴청정을 거치며 바로 친정체제를 구축한다. 선조는 정치적 감각에서는 어느 임금보다 탁월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군의 자질인 ‘덕으로 세상을 교화시키는 정치’에는 실패하였다. 선조의 택군 과정은 그의 총명함도 있었지만 왕실과 신하들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선조 집권 초기 정치적으로 가장 큰 화두는 조광조가 이루지 못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 율곡 이이였다. 그러나 선조는 정치적 배경없이 등장한 임금이었으며 군주의 지도자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한 준비되지 않은 임금이라 그런지 매번 공허한 담론만 양산하고 행동하지 못한 군주라는 평가가 많다.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실천하지 않고 말만 무성하다’고 꼬집는다. 선조는 유달리 다른 임금에 비해 콤플렉스를 많이 가진 임금이다. 적자 적통이 아닌 방계에 의해 임금으로 지명된 임금이라 그의 정통성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 정통성에 자신감이 넘치는 군주와 그렇지 못한 군주에게는 자신감 결여로 인한 리더십의 부재를 선조 연간은 흔히 엿볼 수 있다. ◆ 조선이 그동안 지켜왔던 자존심을 선조 임금은 너무 쉽게 포기하였다 결국 율곡 이이를 전면에 내세운 개혁정치의 시작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이이의 갑작스런 죽음, 개혁실종, 기축옥사로 이어지면서 선조의 정치적 혼미함이 계속 거듭되었다. 이런 정치적 혼란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부패한 왕실과 지도층의 퇴폐문화에 민심은 폭발 일보 직전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 동아시아 변방 국가로 거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일본이란 나라, 그런 나라에게 조선은 아주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임금은 불과 보름 만에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떠난다. 선조는 그 와중에 요동으로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기에 이르고 성난 민심은 임금의 어가에 돌을 던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인 셈이다. 선조는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무려 15차례나 임금 노릇 못해 먹겠다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임금이 왕위에서 물러나려 하면 신하들은 머리에서 피가 나도록 석고대죄를 하면서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이 바로 선위파동인 것이다. 선조는 정치적 복선이 깔린 이런 선위파동을 자주 일으킨 군주다. 선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나름대로 정치적 기교를 펼쳤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왕권 약화를 가져오고 선조 이후 광해군 집권, 그리고 실각과 인조 반정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군주들은 오랫동안 왕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정치력이 약화되는, 그래서 당파적 갈등이 첨예화되는 역사의 길로 접어 든 것이다. ◆ 한 시대의 흥망성쇠는 결국 지도자의 자질에 달려 있다 선조 시대 걸출한 인물들이 특히 많이 배출되었다. 선조 초기 이황·조식 등 성리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거두들이 출현하였고, 이어 율곡 이이·성혼·정철·유성룡·정인홍 등이 그 뒤를 이으면서 선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런 걸출한 문인들과 함께, 세계 전쟁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최고 해군 장군으로 손꼽히는 이순신, 임진왜란 기간 내내 총 사령관을 지낸 권율 등이 등장하는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그 시대를 풍미하였지만 선조의 리더십 부재로 나라는 더욱 혼란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런 혼란스런 정국에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 선조의 리더십 부재, 정치적 판단 미숙으로 인해 조선은 그동안 지켜지던 왕의 카리스마가 실종되고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금이 가면서 정치적 공항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 모든 혼란을 선조 혼자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무리지만 역시 한 나라의 흥망성사는 그 최종 책임이 군주에게 있음을 놓고 볼 때 선조의 리더십은 아쉽기 그지 없다.
기본정보
ISBN | 9788987948355 |
---|---|
발행(출시)일자 | 2004년 08월 10일 |
쪽수 | 278쪽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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